백령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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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 

 

심청각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심청전>의 스토리를 살펴보면 주인공 심청이는 장님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섬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뛰어든다.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심청전의 인당수(印堂水)는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한다. 백령도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과 왕래하는 중간 기착지로 중국인 왕래가 빈번했다. 백령도에 귀양 왔던 이대기(李大期, 조선 광해군 12년, 1620)가 쓴 백령도지(白翎島誌)를 살펴보면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는 북쪽과 서쪽에서 흐르는 조류가 만나 서로 부딪쳐 소용돌이를 이루어 물살이 매우 세고 험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듯, 이곳을 지날 때 물살에 휘몰려 침몰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은 항해의 안전을 위해 항시 주의를 했고 목숨을 걸고 무역을 했던 중국상인들은 두려움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백령도에 관한 자료로 진성여왕과 거타지 설화가 있는데 ‘배가 곡도(백령도의 옛 이름)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이 이를 근심하여 점을 치게 했는데 섬에는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하여 못물에 제물을 차려 놓으니 못물이 한길도 넘게 치솟았다.’ 문헌의 신지는 바로 연화리의 연지(蓮池)로 과거에는 그 넓이가 수만 평이었으나 지금은 농지로 변하였고 자투리 땅에 미꾸라지 양식장을 만들었는데 1996년 8월 연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심청이의 연꽃 환생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또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환생하여 연꽃을 타고 오다가 조류에 떠밀려 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증명하듯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 한 송이 연꽃처럼 떠 있는 연봉(連峰)바위와 연화리가 있으며 인당수 조류의 흐름이 신기하게도 연봉바위 쪽으로 흐르고 있다. 백령도에 가면 심청각을 비롯하여 연화리, 연봉바위, 연꽃마을 등 심청전의 세계에 들어 온 듯 하다.  

  


 

그곳에 있어줘서 고마워, 백령도(白翎島)

 

배를 타고 바다위에 둥둥 떠서 물살을 가르며 섬으로 향하는 여행은 상상 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세상이 등장했고 물질문명이 초단위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그 혜택을 마다하고 잠시 벗어나 가장 순수한 세상으로 향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 나를 배려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뭍에서 가까운 섬들은 하나 둘 다리가 놓이고 있어 여행자들이 꿈꾸는 순수한 섬을 찾는 일은 점점 쉽지 않다. 일상으로부터 완벽한 일탈을 꿈꾼다면 백령도로 떠나보자. 백령도는 인천항에서 뱃길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사실 곧장 가면 2시간 걸릴 거리인데 같은 위도에 북한 땅이 있어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나가 공해로 일단 빠졌다가 백령도로 가기 때문에 4시간이나 걸려 가야하는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쾌속선에 몸을 실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다보면 지루할 사이없이 백령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두무진의 비경이 기다리고 있고 반짝이는 오색 돌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콩돌해안을 지나 심청이가 실존인물인가 놀라게 되는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 차를 타고 사곶해변을 시원하게 달리면서 백령도가 대한민국 최서북단 북방한계선에 있어줘서 감사하게 된다. 백령면 주변에서는 어느 곳에서 낚시를 해도 우럭, 놀래미, 광어, 농어들이 잡혀 손맛이 느껴지는 한가로운 낚시도 좋고 자동차로 달려가며 보는 풍경이 싫다면 천천히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를 따라 흰나래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면 어느덧 상념이 없어지고 감탄사만이 나를 사로잡게 된다. 

 


 

  

 




 


 
 

  


 

태초의 신비와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_ 두무진(頭武津)  

 

령도의 두무진 포구에 도착해서 유람선을 타고 감상하게 되는 절경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기다리고 있다. 예로부터 ‘신이 빚어 놓은 절경’이라 찬사를 받아 온 곳으로 해안을 따라 기암절벽이 약4㎞ 길이에 걸쳐 위풍당당하게 병풍처럼 서서 마치 사열을 받는 듯 여행자들을 반겨준다.

배위에 올라 절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지각색의 기암절벽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다의 거센 파도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지질은 약 12억 년 전 원생대에 형성된 매우 단단한 규암이 주인데 사이사이에 규암보다는 약한 지질의 이질암, 실트암등이 있어 풍화작용에 차별침식 되면서 바위에 여러 무늬를 새겨 놓았고 규암이 풍화작용에 의해 붉은 색을 띠게 되어 기암절벽의 무늬와 함께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남쪽 해안을 따라 돌면 선대암, 형제바위, 사자바위, 고릴라 바위, 말 바위, 우럭바위, 코끼리바위, 병풍바위, 부처님바위, 물개바위, 낙타바위, 송곳바위, 잠수함바위, 물이 빠지면 먹을 수 있는 식수가 나오는 찬물 나드리까지 명승 8호인 두무진의 바위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 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해안암벽에는 해국(海菊)이, 해안에는 땅채송화, 갯방풍, 벌노랑이 같은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큰 바위 틈에서는 범부채를 볼 수 있다.

절벽에서 서식하는 까만 가마우지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백로가 가끔 나들이를 나오기도 한다. 운이 좋은 날에는 코끼리 바위를 지날 때 천연기념물 331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점박이물범이 헤엄치고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에서 두무진 포구에 내리면 두무진으로 이어지는 도보 코스도 놓치지 말고 가보자. 포구 왼쪽에 있는 해안 자갈길을 따라 선대암이 보이는 능선에 오르면 멀리 장산곶을 향하여 세워진 통일기원비를 만나게 된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해변으로 내려가면 선대암, 형제바위 등 두문진의 풍광을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고 촬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해가 떨어질 즈음이라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명장면이 된다.  

 

 

  

  

 
바다와 푸른 소나무가 노래하는 푸른 섬, 대청도(大靑島)

     

조용한 여행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그들만의 소중한 여행지  

 

대청도는 유명한 백령도를 이웃하고 있는 덕에 매일 백령도로 향하는 배들이 모두 대청도를 경유해 지나가니 대청도 여행을 가기는 매우 편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청도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백령도에 가려 덜 알려져 있다. 인천에서 쾌속선을 타고 3시간 반을 가야하는 먼 거리와 유명세가 덜한 까닭에 대청도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북적임에 싫증난 여행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프라이빗 여행지이다.

백령도에서 불과 20분이면 도착하는 짧은 거리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이기에 그런 것일까? 백령도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섬이란 혼자 있는 시간과 같다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을 덕목으로 알고 지내던 시대를 지나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 나를 알아야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가장 나답게 찾아주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일까? 섬도 사람과 같아 뭍에서 떨어져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섬은 외로워 보여도 당당하고 그 섬만의 독특한 개성에 매료 될 수밖에 없다.

대청도로 어쩔 수없이 유배를 가야했던 선비나 왕족은 배 위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대청도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기대는 무엇일까?

 

대청도는 예로부터 유배지였다.

대청도에 관한 옛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언제 누가 유배를 왔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오래전 대청도는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어딘지 모를 섬으로 하염없이 가야했던 그는 억울함에 두려움에 가슴 속으로 깊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도착하여 대청도에서 지내게 되면서 아름다운 이곳에서의 시간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니 떠나는 배 위에서 아쉬움에 다시 한 번 펑펑 울었을 것이다.

 

대청도에는 200여년 이상 된 노송 보호 구역이 있다.

대청도에 왔다면 빠뜨리지 말고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가보자.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적송들이 바다와 어울려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이 주는 위안이 이런 것이구나.’ 저절로 깨닫게 된다.

왜일까? 태어나 처음 왔지만 대청도가 이토록 편안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대청도에 발을 딛고 서있는 나에게 무한으로 용기를 주는 이 편안한 기운은 무엇일까?

인간의 시작점이 바로 바다의 품속 같은 양수였기 때문일까? 사람의 몸은 반이 넘는 60~70%가 물로 이루어져 있고 지구 역시 같은 양의 물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몸은 소우주라고도 한다. 적송이 가득한 솔숲 언덕에 앉아 사탄동해변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사색에 잠기게 된다.

참 아름다운 곳이다.

감탄을 하는 동안 솔바람은 어느새 내 머릿속 근심을 헤아려 다 날려 보내 준다.  

 



  
         

자연이 채색한 푸른 바다와 금빛 모래_대청도 해수욕장

 

우리나라에서 해수욕장하면 누구나 동해안을 떠 올리지만 대청도의 해수욕장에 도착하고 나면 생각이 바뀌게 된다.  

섬을 뺑 둘러 돌아가며 형성된 해변들은 산자락에 갇힌 듯 혹은 산이 숨긴 듯 극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농여해변, 미아동해변, 지두리해변, 모래울해변, 광난두해변, 독바위해변, 답동해변, 대진동해변, 옥죽동해변까지 대청도의 해변들은 조용하게 찾는 이를 반겨준다.

 

대청도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은 길이 1, 500m사탄동해변이다. 우리나라 10대 해변으로 손꼽히는 해변으로 우거진 해송, 희고 고운 금빛 모래,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남태평양의 어느 해변에 와 있는 듯 착각하게 한다. '사탄동' 이라는 한자이름을 풀어보면 모래 사(), 여울 탄()으로 마을 앞에 큰 모래톱이 둑처럼 쌓여 생긴 이름이다. 강한 물살이 많은 모래를 밀고 들어와 만든 해변이라는 의미의 사탄(沙灘)은 그 발음이 악마를 뜻하는 사탄(Satan)과 같아 최근 모래울해변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있다.

모래울해변 다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해변은 길이 2, 500m의 티 없이 깨끗한 농여해변이다. 간조 때 드러나는 광활한 백사장은 단단한 고운모래가 융단처럼 펼쳐져 걷기 좋으며 만조 때는 보이지 않던 풀등이 여기 저기 나타나 신기한 경치를 펼쳐 보인다. 조금 멀리 시야를 넓혀보면 해변 주변에 바위이지만 나무 같은 결을 가지고 있는 고목나무 바위등 독특한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 푸른 파도와 바위가 어우러진 티 없이 깨끗한 농여해변의 모래사장을 걷노라면 누구나 이곳이 낙원이 아닐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농여해변 바로 옆으로는 미아동해변이 있는데 평소에는 두 개의 해변이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면 농여해변과 하나로 연결되어 별칭으로 원 플러스 원(1+1) 해변이라고도 한다. 200m 가량 되는 해안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있으며 다른 해안과는 다르게 해변을 따라 풀들이 자라 초록의 천연 잔디가 펼쳐진 듯하다. 1km 300m지두리해변도 빠뜨릴 수 없는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이다. 지두리라는 말은 '경첩'을 뜻하는 대청도 사투리 '지두리'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바람을 막아주는 병풍이 되어주는데 그 모양이 마치 경첩같다하여 지두리라 불렀다고 한다. 지두리 해변은 멀리서 보면 뒤에 있는 수리봉이 새의 모양을 하고 있어 신기하다. 이 커다란 새는 마치 먼 길에서 돌아와 바다에 머리를 파묻고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 듯하다. 대청도에 도착하면 주민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새가 바로 대청도에 있는데 잘 찾아보라는 수수께끼를 내주는 데 바로 그 정답이 수리봉이다. 실제로 대청도는 예로부터 새()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다른 고장의 매보다 날쌔고 사냥을 잘해서 전국 최고의 매로 이름이 높았던 해동청(海東靑)이라는 새가 살던 곳이다. 그 명성은 원나라까지 알려져 해동청은 칸들의 매사냥과 세계를 누볐던 군의 통신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리봉이 내려다보이는 매바위 전망대에 가면 해동청의 지나간 시간을 볼 수 있다.

옥죽동해변은 해변 뒤쪽 산 너머로 모래사막이 있어 함께 유명해진 해변이다. 해변은 포구의 방파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둘로 갈라져 있고 길이1.5, 50m 크기의 광활한 백사장이 아름답고 바닷물이 마치 목욕물을 데운 것처럼 따뜻해 가족단위 여행자들의 휴식처로서 추천할 만하다. 답동해변은 길이 1, 300m로 노송들이 해변을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이며 백사장 뒤에는 넓은 잔디로 된 뜰과 운동장이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운동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이 해변은 우럭·놀래미·농어·가자미·광어 등을 잡는 갯바위 낚시터로도 유명하며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선진포 선착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배 시간을 남겨두고 둘러보기 좋은 해변이다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冬柏自生北限地) 

 

주로 우리나라 남쪽지방의 따뜻한 해안에서 자라는 동백꽃을 서해바다 그것도 위도로 보아서는 매우 북쪽에 위치한 대청도에서도 볼 수 있다. 동백나무 자생지가 있는 곳은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삼각산(343m)의 서쪽 능선과 남서방향 능선 사이 남동향 산비탈이다. 북서방향이 막혀 겨울철의 북서 계절풍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고 따뜻한 해류의 영향을 받아 난대성의 동백나무가 자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백나무는 전 세계의 식물구계(植物區系)를 설정할 때, 이것을 표지종(標識種)으로 삼는 중요한 식물이다. 또한 동백나무는 나비와 벌과 같은 곤충이 아닌 동박새가 화분을 매개하여 종자가 생기는 조매화(鳥媒花)이다. 동박새는 깃털이 아름다운 작은 새로 동백나무의 꿀과 열매를 먹고 산다. 대청도의 동백나무자생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동백나무 가운데 가장 북쪽에서 자라고 있어 남쪽보다 추위에 강할 것이라 생각되어 품종개량 등의 학술적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대청도 동백나무 숲은 1933년 천연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어 우리나라에서 최북단 동백나무 자생지로 보호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막이 있다면 믿을 수 있나요? 옥죽동 모래사막   

 

 

아름드리 푸른 소나무 숲 그리고 조용하기만 바닷가 이외에 대청도에는 매우 신기한 명소가 숨겨져 있다.

우리나라에 사막이 있다면 믿을 수 있나요?

하루에도 몇 번 씩 모래가 바람을 타고 산을 넘어 다니는 기이한 진풍경이 바로 이 섬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무 설명 없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면 어디? 외국 갔니?”, “거기 사하라 사막이야?” 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 모래사막이 대청도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지나가는 스님이 해안에서 그물 일을 하고 있는 어부에게 저 산에 모래가 올라 와 덮이거든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아라.”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당시 선진포에 살고 있던 이 어부는 무슨 의미인 줄 모르고 어리둥절해 했으며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역시 그 말을 몰라 궁금해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모래를 실은 바람이 불어와 쌓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모래산을 이루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그 때서야 스님의 말뜻을 깨닫고 탄복했다고 한다.

밀물에 밀려 온 옥죽포 해변의 모래가 썰물에 햇볕에 드러나 바짝 마르게 되면서 그 모래를 바람이 산을 오르며 날라 와 만든 사막으로 크라이밍듄(climbing dune)이라고 한다. 환경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사막이라 부르는 활동 사구로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연흔(ripple mark)이 생성돼 다양한 사층리 형성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또 인근 해안가 보링쉘(boring shell) 화석, 규암 등 암석 지대와 함께 위치해 보전가치가 매우 높은 자연유산으로 꼽힌다.

이곳은 과거 66가 넘던 거대 사막이었으나 대청도에는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근 주민들은 모래 바람 때문에 생활에 큰 불편을 겪다보니 20여 년 전부터 옥죽동 해안에 모래가 산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풍림을 심었고 그 나무들로 인해 사막의 면적은 20년 전에 비해 5분의1 수준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바람이 만들어 준 자연현상이 기이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일한 사막이다 보니 최근 들어 보전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모래사막의 가치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매일 모래바람을 마시며 살아가야 하는 현지인들의 불편한 생활도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매바위 전망대  

 

매바위 전망대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형상을 닮은 매바위가 보인다. 예로부터 대청도는 송골매의 일종인 해동청의 채집지였다. 대청도 서내동(대청1)에는 매막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예로부터 매를 기르고 훈련시키는 매막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귀족층에서는 매사냥이 성행했는데 고려 충렬왕은 매 사육 및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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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글 제공: 양소희 작가님